요가 워크샵 후기 / Assisting Intensive



일주일 동안 조셉 선생님의 어시스팅 워크샵이 있었다.

잊기 전에 느꼈던 감정과 생각부터 적어보자면, 감동적인 워크샵이었다. 6:30AM 마이솔 수련으로 시작해서 서로 시연하며 연구하고 4PM에 마치는 일정이었다. 체력적으로 힘든 시간이었는데 마이솔 수련이 옵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참여했고, 원래 마이솔 수련을 하지 않던 빈야사 선생님들도 점점 더 새벽 수련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날 서로의 감정을 나눌 때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어시스팅을 배우는 수업이었지만 요가를 수련하는 삶에 동기를 줬다고 하고, 이미 수련에 익숙한 선생님들은 또 무언가를 배우고 느꼈던 정신적인 리트릿에도 가까운 시간이었다고 했다. 나도 같은 걸 느낀 일주일이었고, 조셉 선생님도 리더였지만 같은 걸 느끼신다고 했다. 한동안 여운이 남을 워크샵이었다.

오랜만에 순수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을 만났다. 수련하는 사람들에게는 외관적으로 느껴지는 강인함이 있다. 울그락 불그락 하는 팔의 근육들 뒤로 시간을 보내다보니 그들의 마음들이 들어나기 시작했다. 키가 큰 닉은 그의 덩치를 내게 맡겨줌으로서 내가 핸즈온을 해 볼 수 있게 해주고 싶다고 했고 워크샵 뒤로 갈수록 어려워지는 세컨드 자세들이 나오면 수련을 오래 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몸을 내어줬다. 아무리 오래 했어도 힘든 자세라는 걸 알아서 서로가 감사해 했고, 수고로움을 당연히 생각하지 않았다. 이기적인 마음이 들면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기회가 없어질 수도 있던 워크숍이었는데 안전하게 마무리되었고 다양한 사람들을 잡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티티씨에 비하면 짧은 시간이었는데 인생에 잊지 못할 사람들이 되었다.

다들 가까운 곳에서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애틀랜타, 필라델피아, 버몬트 등 미국 전역에서 두 분은 독일에서 오셨다. 나는 삼십분 운전, 오후 트래픽이 있을 땐 한 시간이 걸리는 걸 불평했는데 나보다 두 배로 걸리는 보카에서도 매일 왔다 갔다 하셨고 마이솔 룸에서 봤던 선생님은 일주일에 한 번식 편도에 두 시간을 운전해 다녀가신다는 것이었다. 앞으로 거리에 대해 불평할 일이 쏙 들어갔다.

나이가 많은 선생님이 계셨다. 하루는 내게 두 살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아시고 너무 이쁠 시절이라며 다시 그 시절의 아이를 기르고 싶다고 하셨다. 그 말이 하루 종일 마음에 남았다. 나는 아닌데, 나는 힘들기만 한데. 내가 뭐가 문제인 걸까. 다음날 조심스럽게 여쭤봤다. 당신의 시대엔 더 보수적인 세상이었을 텐데 엄마 됨이 힘들지는 않았냐고. 나는 힘들다고. 그런데 나만 그런 것 같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힘들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힘들면 꼭 병원을 가라고 하셨고 사실은 자신의 엄마가 정말 좋은 엄마셨다고. 당시 변호사 셨기에 자신의 삶을 서포트해 주셨고 아이를 기르는 것이 힘들면 그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고 그시대에 적극적으로 그렇게 도와주셨다고 했다. 그래서 아이들 키우는 일은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고 자신은 다시 공부를 시작하셨다고 했다. 아이들과의 관계는 어떠하냐고 여쭈었더니 좋다고, 자신의 엄마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과도 그렇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내게도 아이의 삶은 그들의 것이라고 너무 투영하면 힘들어진다고 하셨다. 너의 삶을 살고, 둘째를 가지고 싶지 않다면 그렇게 하고, 모든 사람들의 조언을 듣지 말라고 하셨다. 속으로 부럽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엄마가 있었던 것이,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있던 환경이.

대화가 길어지며 자녀들의 이야기가 나왔는데 자녀들은 나보다 더 나이가 많았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흘러가다가 아들이 십 년 전쯤 큰 사고를 당했고 휠체어를 타고 있으며 머리엔 큰 수술 자국이 남았다고 그 사건으로 자신의 커리어와 돈을 다 내려놓고 아들 옆에서 도와주고 있다고 하셨다. 도움이 많이 필요로 해서. 부럽다는 마음을 지녔던 내 마음이 부끄러워졌다. 아, 무슨 이야기들이 뒷면에 있는지 모른 채 또 혼자 생각해버렸다는 사실이. 괜찮냐고 물었더니 이제는 괜찮다고 말씀하셨다. 눈에는 눈물이 맺혔지만 떨어지지 않았고, 나도 그 "Now"라는 단어 뒤의 시간들이 느껴져서 잠시 침묵으로 서로를 응원했다.

종교에 대한 대화도 인상 깊었다.

일주일 동안 아무도 이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다. 워크숍을 마치고 뒤풀이 아이스크림 집에서 종교와 요가의 관계에 대해 자신의 경험을 나누었는데 한 명은 유대인이었고 나를 포함 세 명은 가톨릭이었다. 나를 제외한 다른 분들은 한동안 요가를 육체적 이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그 넘어서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고 느꼈지만 요가 책들의 나오는 "God"이라는 단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들이고 싶지 않았다고. 그러나 대화의 결론은 이제는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신은 하느님임은 변함이 없다고. 요가는 자신의 종교를 연결해 주는 하나의 브릿지 같다고. 요가를 할수록 더 신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우리의 공통된 결론이었다.

미국인들에 대해 오해가 있었다. 그들은 항상 자신감이 넘치고 speak up 하는 데에 망설임이 없다고 생각했다. 큰 오해였다. 영어를 못해서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또 시니컬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부끄러운 얼굴이기도 했었다. 몰랐다. 나는 또 미국인의 전형적인 회의적인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오해였다.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배척할 것이 아니라 내가 시각을 그들처럼 생각해 보는 노력이 필요하겠다고 그 노력을 하기로 다짐했다. 그것이 말하는 방식으로 이어지니까.

원래도 좋아했던 조셉 선생님이었는데 그의 진가가 나타난 워크샵이었다. 옆에서 10개월 동안 어씨를 배울 시간들이 더 기대된다. 아이 낳고 2년 만에 집안일에서 손을 놓고, 바다에게서도 떨어져 보낸 일주일이었는데 (집에 와서 정말 잠만 자고 나갔다.) 육아로부터 잃었던 무언가를 채울 수 있었다. 당연히 기술적으로도 많이 배웠지만 정신적으로 충만해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Previous
Previous

엄마의 수련

Next
Next

RISHIKESHI RYS 500 졸업